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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구입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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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산 시집

지난번에 덕평 휴게소에 갔다가 편의점 가판대에 두꺼운 시집 한 권이 꽂혀있는 것을 보았다. 시집은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그대 그리고 나의 시’라는 꽤 긴 제목을 가지고 있었는데, 길고 멋진 시집 제목에 어울리지 않게 ‘오늘만 50% 할인’이라는 이름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 뭐였을까, 그날 봄바람을 쳐맞아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휴게소 편의점 가판대에 떨이로 팔리고 있던 시집의 모습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깊은 학식을 갖춘 고상한 선비가 생활고에 시달리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체면 마다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만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멋진 붓글씨로 가훈을 써드리겠다’든가, 잔칫집에 가서 ‘이 경사스러운 날 제가 시를 읊어드리겠습니다.’ 처럼, 그 댓가로 돈을 기대해야 하는, 선비에게 체면 구기는 일을 한 걸음 뒤에서 보는 것처럼 안쓰러웠다.

선비는 지금껏 살아오며 이런 일을 해 본적이 없으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우왕좌왕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하는 그 꼴이 우스꽝스럽고 한심해 보일 것이다. 돈 따위로 그 값을 매길 수 없는 우아한 학의 날개짓이 등가교환의 법칙 안에서 놀아날 수 밖에 없음이 선비는 얼마나 서글플까. 하지만 어쩌겠나, 가장인걸.

가족을 위해 큰 용기를 내었음에도 선비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어쩌나, 오늘도 허탕을 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판대에 꽂힌 시집을 들고 들어가 계산을 했다.

 

봄 바람은 해로워..

공룡수목원 가는 길에 차에서 잠시 들춰봤는데, 솔직히 괜히 샀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시는 ‘한국의 명시’들로 구성돼 있다. 그러니까 거의 다 아는 시들이란 거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때 교과서나 수능 모의고사 지문 등에서 한 번쯤은 읽어본 유명한 시인들의 시.

몇 십년째 국어 교과서의 왕좌를 지키고 있는 윤동주와 김소월이 보이고 한용운이 보인다. 수능 모의고사 지문의 역사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박인환과 이육사 또한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만나는 고전 시들이라니..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다시 봐도 역시 명시 임에는 틀림 없지만. 시를 다 읽으면 다음 문장들이 머릿 속에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후유증을 동반한다.

이를 테면 이런거다.

12번. 위 시를 설명한 다음 보기 중 사실과 다른 하나를 고르시오.(2점)

① 철수 – 화자는 상황의 긴박함을 어순의 도치를 통해 나타내고 있어.
② 영희 – 대상의 고고한 아름다움을 그렇지 않은 때와 대비하여 극적인 효과를 보여주려 해.
③ 명수 – 화자는 나라 잃은 슬픔을 떨어진 모란에 비유하는 것 같아.
④ 민경 – ‘찬란한 슬픔의 봄’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상징하고 있구나!

 

어차피 싼 똥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 시집이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그대 그리고 나의 시’ 라는 제목처럼 내 인생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좋은 시는 곱씹을 수록 좋은 것이겠지 뭐. ㅋ 어쨌든 이날 난처한 사람(?) 한명도 내가 구했으니 이래저래 적당한 등가교환을 한 셈이라 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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